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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의자왕 황산벌 전투

by 옛이야기 2023. 3. 25.

황산벌 전투 - 민족기록화 오승우 作

 

신라는 백제를 치고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함으로써 고구려와 백제를 모두 적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편, 백제는 신라의 대야성을 빼앗더니 고구려와 손을 잡고 신라가 당나라와 교류하는 통로인 당항성까지도 공격하였다. 이에 강한 위협을 감지한 신라는 생존을 위해 당나라와 손을 잡게 된다. 백제는 무왕 이래 신라와의 수차례 전쟁과 의자왕의 민심 외면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진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계백 장군이 5천 명의 결사대를 꾸려 대항을 하였지만 끝내 사비성은 함락되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대신들, 일반백성들에 이르기까지 1만 2천여 명이 당나라로 끌려간다.

1. 신라 김춘추의 외교전

642년 백제 의자왕은 윤충을 시켜 신라의 서부 지방 핵심 요새인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의 성주는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었는데 품석은 일전에 남편이 있는 여인을 강제로 취한 전력이 있었다. 그 남편은 검일이란 자였으며 평소 원한을 품고 있다가 백제군이 침입하자 백제와 내통하여 성 안에 불을 지르고 이윽고 대야성이 백제의 손에 떨어진다. 김품석은 부인을 포함한 가족들과 자결을 하고 이 소식을 들은 김춘추는 크게 충격을 받는다. 신라는 이러한 위기를 외교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고구려와 손을 잡으려 하였다. 김춘추가 사신으로 가 연개소문과 회담을 했지만 오히려 감금을 당한다. 고구려의 고위관리 선도해에게 뇌물을 먹이니 그가 <토끼의 간> 이야기를 힌트로 주어 거짓으로 신라땅을 돌려주도록 왕을 설득하겠다 하고 달아난다. 김유신은 결사대를 준비 중이었다가 고구려의 국경을 넘어 김춘추를 무사히 데리고 온다. 이에 따라 김춘추는 648년 당 태종에게 지원을 청하였다.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는 야욕으로 두 나라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므로 기뻐하였다. 신라는 매우 적극적으로 대당 외교를 진행하였으며 백제를 먼저 쳐야 고구려 정벌이 가능하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마침내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친다. 

2. 의자왕의 폭정

의자왕은 태자 시절부터 부모형제간에 효성과 우애가 깊고, 민생을 우선적으로 살펴 '해동 증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게 되었고 점점 그 정도가 더해져 충신들은 걱정에 빠졌다. 백제의 충신 성충은 의자왕에게 직언을 올렸다. "신라와 당이 손을 잡고 우리나라를 칠 준비를 하고 있으니 부디 정신을 차리고 국방에 힘쓰고 민생을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의자왕은 듣지 않고 노하여 성충을 옥에 가두었다. 충신 홍수 역시 직언을 올리자 유배를 보냈다. 657년 경부터는 백제에 여러 가지 해괴한 일들이 일어나 백성들이 동요하였다. 날이 가물어서 땅이 쩍쩍 갈라지는데 빨갛게 물들었다. 오회사라는 절에 붉은 말이 나타났다. 사비성의 우물물이 모두 핏빛으로 물들었다.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 궁궐에서도 귀신이 나타나 백제가 망한다고 외치고 땅 속으로 꺼졌다. 그 땅을 파보니 거북이 등에 글씨가 쓰여있었다. "백제는 둥근 달이고 신라는 초승달이다." 어떤 자가 이는 차면 기운다는 뜻으로 백제는 망하고 신라가 흥한다는 뜻이라고 아뢰니 의자왕이 그를 처형하였다. 신하들은 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그가 마음에 들어 할 말만 하였다. 일부에선 의자왕의 폭정은 백제를 멸망시킨 측에 의해 백제 정벌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기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3. 황산벌 전투, 계백, 관창, 백제 멸망

660년, 당 고종은 소정방에게 13만의 병력으로 백제를 치게 하였다. 신라 김유신은 보급을 맡아 군사 5만으로 당군을 지원하기로 하였다. 의자왕이 부랴부랴 대책을 준비하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논쟁은 결말을 내지 못하고 자신들의 손익계산에만 열중하였다. 왕은 계백에게 방어를 명하였다. 계백은 신라를 막기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결사대를 조직하고 스스로 자신의 가족들의 목숨을 앗아 각오를 다졌다. 김유신의 신라군은 절대적인 숫적 우세에 있었지만 백제의 결사대와의 싸움에서 계속 패하였다. 신라 김흠춘이 화랑인 아들 반굴을 불러내어 백제군에 돌격하게 하였다. 장렬히 전사하였지만 신라군의 사기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김유신은 갈 때까지 갈 작정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답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번에는 김품일이 역시 화랑인 아들 16세의 관창에게 임무를 맡겼다. 백제에서는 너무 어리다 하여 응하지 않았지만 관창의 끊임없는 도발에 잡은 다음 보내주었다. 그러나 이를 부끄러워한 관창이 다시 나타나 또 도발을 하여 잡아왔는데 계백은 이를 죽이는 것이 신라 수뇌부가 원하는 것인 줄 알지만 운명을 체감하며 관창을 처형해 말에 달아 돌려보낸다. 신라군은 두 어린 화랑의 숭고한 죽음을 겪고 각성하여 백제군을 향해 총공세를 펼친다. 넓은 황산벌에서 백제 5천 결사대는 전원 장렬히 최후를 마친다. 의자왕은 태자에게 사비를 사수하게 하고 본인은 웅진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려 하였다. 하지만 사비는 금방 함락이 되고 웅진성주 예식진이 배반하여 웅진에 들어간 지 5일 만에 예식진이 의자왕을 결박하여 당나라에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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